:::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

  * *
[인권강좌] 제13회 파리망명객 이유진과 민가협 어머니의 만남 / 이유진
민가협04-18 19:38 | HIT : 3,698
"파리망명객 이유진과 민가협 어머니의 만남 "


때 : 2001.6.29.
곳 : 프란치스꼬 교육회관
강사 : 이유진

정리 : 정현상(동아일보 기자)


민가협 지상 인권강좌 / 파리 망명객 이유진 선생의 삶


"고통의 파리 망명생활 26년, 자유와 양심을 배웠다"


저야말로 어머니들로부터 사연을 듣고 배워야 할 사람인데 제가 감히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귀국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며 저의 삶을 두서 없이 고하고자 합니다.

1963년 24살의 저는 서울이 너무 답답해 프랑스 파리로 갔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헌병이 교수를 마구 잡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민주화 운동하던 친구들이 형사들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갔지요. 저는 그저 답답하고 숨이 막힐 뿐이었습니다. 어디서 싱그러운, 폭력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자유의 공기 좀 마셨으면 했지요. 제 청춘의 꿈은 고작 그거였습니다.
그렇게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파리의 첫인상은 풍요였습니다. 서울의 가난한 거리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뚝 솟아 하늘로 뻗어 오른 마로니에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름드리 마로니에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 우리 네 삶에 저런 꿋꿋함이 있었던가. 비틀리고 얼룩진 역사, 그 속에서 몸부림치며 함께 비틀린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파리에는 통행금지도 없더군요. 신호등도 대부분 무시하고 좌우만 살핀 뒤 건너고 싶은 데서 건넜습니다. 누군가 찻길을 건너면 달려오던 자동차는 속도를 줄입니다. 자동차도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란 질서와 무질서 그 중간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도 파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게 많았습니다. 인생에는 원래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사람들이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삼는 데 고통이 따른다고 한 스님들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상 문제도 그렇습니다. 모든 면에서 파리의 색깔은 총천연색이었습니다. 빨간꽃 하얀꽃 노랑꽃이 다 있었습니다. 사상이 다르다고 민족을 반쪽으로 가르지 않았습니다. 1944년 프랑스가 나치에서 해방되었을 때 당시 국민들의 공산당 지지율이 26% 정도였습니다. 그때 드골 장군은 공산당 각료를 3명이나 입각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절단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사상의 차이로 미소가 갈라놓고, 내부의 세력이 갈라놓았지요. 사상 때문에 민족을 가르지 않는 프랑스가 우리보다 한 수 위로구나, 그런 걸 느꼈습니다.

하루는 책을 사서 뤽상부르 공원의 노천 카페에 갔습니다. 그때 40대쯤으로 보이는 프랑스 인 두 사람이 옆자리에 와서 앉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시즘을 융합하면 좋은 정치사상이 될 것 같아”라고 말하자 다른 한 명이 “넌 공산주의자니까 공산주의를 좀더 풍부하게 하겠다는 거냐?”라고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제 마음이 떨리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공산주의자가 바로 내 곁에 있다니. 분단된 나라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이 제 몸 속에서 뒤섞이는 걸 느꼈습니다. 알지 못하는 공산주의자가 제 옆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자신이 너무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날 저녁 저는 방에 돌아와 제 처지를 깨달았습니다. 공산주의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리 무서울까. 공산주의자라는 그 프랑스인은 시종 온화한 표정이었는데 나는 왜 그토록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과 고통에 빠졌을까.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해방되던 해 가을 아버지와 함께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왔습니다. 그때도 저는 '빨갱이놈' '공산당놈'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지요. 그래서 공산주의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으로 굳어 있었던 겁니다.
그날 사건을 계기로 저는 한국의 반(反)공산주의를 학위논문 주제로 정했습니다. 저를 한 공산주의자의 그림자에 놀라게 하고, 저를 허깨비로 만든 한국의 반공산주의를 사회심리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한반도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더군요. 프랑스 언론을 통해서도 한국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학 가기 전보다 한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학간 지 3개월쯤 되자 돈이 떨어져 중국식당에 가서 접시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나흘 일했더니 몸살이 났어요. 어쩔 수 없이 그만 두자 주인이 500프랑 주더군요. 원래 나흘 일하면 250 프랑 정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주인이 특별히 웃돈을 얹어주신 거지요. 가난했을 때 얼마간의 웃돈은 어찌나 고맙게 여겨지던지요. 그래서 저도 저희집을 고치거나 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는 꼭 얼마간 웃돈을 얹어줍니다. 진짜 실한 교훈을 하나 배운 거지요.

저는 사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는 유학시절의 고생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에 드는 젊은이들 보면 유학시절 중에 접시닦이는 꼭 해보는 게 좋다, 그래야 책 읽을 때 그 의미심장한 것까지 읽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잔돈벌이를 좀 해봐라, 그래야 돈에 대해 거리감도 가질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공부란 온 나라가 화평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되라고 하는 것이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파리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어요. 우리끼리는 서로 좋아하는데, 유신시절이라 권력자들이 늘 감시를 했어요. 프랑스 말을 조금 잘하게 되자 저는 급사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었지요. 그때 독일 광부들이 실업하고 파리에 와서 세느강 다리 밑에서 자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순수한 동정심에서 한 20프랑 쥐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그런 것도 싫어했어요. 여권을 연장하기 위해 한국 대사관에 가면 영사가 반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참다가 역정이 나서 ‘당신 진짜 영사야? 영사라면 공손할텐데 어디 진짜 영사 좀 모셔오지?’라고 대꾸했다가 승강이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게 뭐 학문적으로 거창하게 시작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접해주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무시하면 자신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거지요.

1967년 동백림 사건 때도 그랬습니다. 아무도 사건 전모를 알지 못해 공포감이 컸습니다. 주변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 중에 진짜 간첩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친북한 세력도 아닌 사람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절대로 간첩일 리 없는 이들이 있었던 겁니다. 고암 이응노 선생 부부나 당시 파리 정치대 학생이었던 친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사관에 찾아가 항의시위를 했지요. 그때 이후 저는 확실하게 정보기관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파리에서 국제동양학자 대회가 있었습니다. 남북한 교수들과 국외학자들, 동양학에 관심있는 외국인 학자들이 다 모인 자리였습니다. 저도 프랑스 학자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회의장에 갔더니 장영사라는 중앙정보부 파리 책임자도 나왔더군요. 대사관의 영사 가운데 기관원도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기관원이었지요. 그가 저더러 왜 나왔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나야 학자니까 초청받아 나왔지. 그런데 장형은 왜 나왔소? 중앙정보부가 여기에 나올 데요?’라고 받았습니다. 장영사는 얼굴만 붉히더군요. 그가 저에게 시비를 건 것은 꼭 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거기 온 국내학자들의 언행을 통제하려는 목적도 다분해 보였습니다. 학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분단의 현실은 분명했습니다. 이건 무슨 학술대회가 아니라 적과 마주친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거기서 저는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일방적이지 않고 제 자신의 판단으로 양쪽을 비판했습니다. 자신들만 옳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학문과 교육,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폐해를 안겨주었습니까. 그때는 남이나 북이나 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 그놈의 분단상황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79년 잘 알려진 문제의 그 한영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갓 마흔이 된 저는 대학 후배 한영길의 정치망명을 도와주었다가 하루 아침에 북괴공작원, 아동인질범으로 몰린 것입니다. 한영길은 당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파리 부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국으로 돌아갈 때쯤 내외가 불화해서 부인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세느강에서 시체로 떠올랐고, 자살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관원이 한영길에게 ‘공무원이 마누라 간수도 제대로 못해 나라 망신을 시켰으니 고국에 데려 가서 재산을 몰수하고 혼을 내주겠다’고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 얘기는 한영길에게서 들었습니다. 당시 한영길은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에게 말렸습니다. 정보기관의 미움을 사서 받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핍박이 두려워 프랑스에 망명하겠다는 가엾은 후배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파리 경시청에 데려가 3개월간의 임시망명증을 얻도록 주선했고, 가톨릭 대부님과 수녀님들, 친구들 집으로 그를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망명생활이 두 달 반쯤 지났을 때 그가 기관원들에게 잡혔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기자는 한 명도 없이 한국특파원들만 초대된 주불한국대사관에서 한영길씨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믿었던 대학선배가 알고보니 북괴공작원이었고, 그에게 딸을 인질로 잡히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히 중앙정보부가 개입됐던 거지요. 프랑스 언론도 그런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한국특파원 누구도 확인하지 않고, 대사관에서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썼습니다. 당시 한영길을 도와주었던 사람들 모두가 간첩 계보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제 대부님이 현지 프랑스인이었는데, 그 분도 계보도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부끄러워 저는 대부님에게 한 달 이상 그것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대부님은 그 얘기를 듣고는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게 없으니 상관없다.”고 하시더군요.

정보기관으로부터 간첩으로 몰린 뒤 저는 파리의 동포들에게서도 외면당했습니다. 성당에 가도 동포들이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15살 정도 되었던 딸이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서울에 남은 부모님과 다른 동생들, 친척들도 저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친구들은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프랑스 경찰도 저에게 아무런 혐의를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경찰도 저를 한번도 호출한 적이 없습니다. 사건의 전모, 즉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히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한영길은 한국에서 자살했다고도 하고, 거리의 부랑자로 떠돌다가 죽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딸은 이제 성년이 되어 한국에 살고 있을텐데 저의 등장으로 인해 아버지의 감춰졌던 면이 드러나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1년반 정도 지나서 저는 북한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남한에서는 간첩으로 몰려있었으니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없었지요. 그리고 75년에 프랑스시민증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프랑스인 신분으로 북한을 간다면 큰 일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북한을 간 것은 그곳 평양이 제 고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정보기관에서는 평양에 갔다오고 그 뒤 간첩행위를 한 게 있는지 여부를 따지려하는데, 저는 평양에 가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고싶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남쪽 반공산주의의 네모 반듯한 틀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어떻게 북쪽 공산주의의 쇠항아리 속으로 다시 들어가겠습니까.
한영길 사건 뒤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평양에 갔다온 것도 처벌할 수 있는 공소시효가 지났습니다. 그 뒤에 정보기관은 저에게 소명절차를 요구했습니다. 그것만 받으면 고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명절차라는 게 자신을 굽히는 겁니다. 독일의 한 목사친구는 간첩으로 몰린 적도 없는데 안기부의 심리적 폭행에 굴복해 전향간첩으로 서울에서 4년인가를 살다가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정신적인 뇌출혈이 일어난 거지요. 저에게도 뭐 그냥 다녀오지,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가서 몇 자 끄적거려주면 되는 모양인데, 라고 제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개인의 자존심 싸움이 아닙니다. 아직도 이러저러한 장애로 20년, 30년씩 귀국이 지연되고 있는 해외민주인사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사항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문제, 정의와 불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귀국하면서 소명절차를 거부했습니다. 그토록 한결같이 소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잘못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제게 지나온 인생이 억울하지 않으냐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억울한 것은 국내에서,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온몸 온 정신으로 싸우면서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국내 민주인사들인 것입니다. 그들 덕분에 저에게도 국가의 울타리가 낮아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소명절차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정도가 제가 그분들이나 여기 계신 어머니들의 품위를 지켜주는 것이라 믿었고, 이번에 이렇게 떳떳하게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해외에서 고국땅을 그리워하면서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상황이 심각합니다. 이미 늙고 병든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이기주의자가 못돼 생활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직장도 불안했습니다. 고통이 이중삼중으로 겹쳐있지요. 고국에서 그분들에 대해 신경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귀국하기 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세상에 가서는 민주화운동이고 뭐고 다 말고 철저하게 이기주의자가 되어 어머니께 효도하며 살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있으니 또 다음 세상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세상에 이렇게 불효하고 살았으니, 다음 세상 하나쯤은 설령 이기주의자가 된다 해도 어머니께 바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남북통일을 바라며 망명지 파리에서 활동했던 고암 이응노 선생님은 죽기 전에 조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파리 묘지에 쓸쓸히 묻힌 이응노 선생님처럼 저 역시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죽지나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드디어 밤낮으로 그리던 조국 땅을 이렇게 밟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뜻에서 절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일시 6월 29일 / 장소 프란치스꼬 교육회관
정리 정현상(동아일보 기자)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
 
 
Copyleft 1985-2004,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MINKAHYUP | minka21@hanmail.net
서울시 종로구 명륜3가 108-3 1층 | TEL 02-763-2606 | FAX 02-745-5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