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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서울고법 '위장간첩'관련자 무죄선고...국가에 의한 '사법살인'인정
민가협01-06 12:59 | HIT : 4,800
[사회]누가 이수근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서울고법 ‘위장간첩’ 관련자 무죄 선고… 국가에 의한 ‘사법 살인’ 인정


1969년 2월 13일 당시 중앙정보부는 언론에 ‘위장귀순한 이중간첩을 체포했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공개했다. 발표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을 통하여 자유대한으로 월남한 북괴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45)은 월남 당시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허다하게 있었음에도 거물급 언론인이라는 점을 감안 여러 차례 반공행사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이수근은 김일성을 비난하는 논지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등 많은 의문점을 드러내어 중앙정보부는 그의 위장 귀순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내사를 계속한 결과, 이수근이 배경옥(29·이수근의 처조카)과 해외 탈출을 모의한 끝에 위장 여권을 마련하여 1월 27일 5시 30분 CPA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추적 끝에 해외 모 지점에서 1월 31일 캄보디아로 출국하려는 이들을 검거하여 2월 1일 밤 8시 50분 공군기로 김포로 압송했다.”

결정적 증거 암호문은 애초부터 없어
중앙정보부는 아울러 이씨가 67년 2월 중순 북한노동당 대남사업 총국장 이효순에게서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 잠복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순했으나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처조카 배경옥씨를 포섭하여 월북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3월 22일 이수근씨와 배경옥씨, 배씨의 동생 배인향씨, 이씨의 외조카 김세준씨 등 7명을 기소(검사 최대현)하면서 이씨가 김일성 앞으로 보내는 암호문을 작성했다는 혐의를 추가했다.

5월 1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재판장 이상원 부장판사, 배석 정상학·진성규 판사)는 이수근·배경옥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국가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사건을 처리했고, 1심 판결이 나온 지 채 두 달도 안 된 7월 2일 이수근씨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배경옥씨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고하여 12월 23일 대법원 판결로 형이 확정됐다.

지난해 12월 19일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박형남)는 배경옥씨와 김세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69년 당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이 국가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음을 법원이 40년 만에 인정한 것이다.

이씨는 항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1심 재판만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구속 당시 29살이던 배씨는 무려 20년을 복역하고 89년 12월 22일 초로의 늙은이가 되어 철창 밖으로 나왔다.

배경옥씨는 “중앙정보부를 탓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김형욱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2007년 1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위’)가 발표한 보고서는 이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이수근이 중정의 지나친 감시 및 재북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중정이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의 생명권을 박탈한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이 이수근씨가 간첩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한 암호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69년 당시 검찰은 이씨를 기소하면서 그가 “배은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로 시작하는 몇 줄 분량의 암호문을 작성하고 68년 5월 5일 출국하는 배경옥씨 편으로 모스크바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과거사위는 그러나 일단 암호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며, 검찰이 이씨가 작성한 암호문이라고 주장한 암호문에도 국가기밀이라고 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고, 난수표처럼 암호문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이 암호문의 존재는 중정의 최초 발표에는 포함되지 않았다가 검찰 공소장에만 포함됐다. 중정이 이처럼 중요한 증거를 발표에서 일부러 빠뜨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재심 결과와 과거사위 보고서, 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월간조선> 89년 3월호 조갑제 기자의 기사를 종합하면, 중앙정보부는 이씨와 배씨가 69년 1월 27일 오후 5시 30분발 홍콩행 CPA기에 탑승한 다음 날인 1월 27일 밤 이씨가 사라진 사실을 파악했다. 이씨는 귀순한 후 줄곧 중정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김형욱 중정부장은 당시 사이공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이용대 공사에게 긴급 전문을 발송하고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 탄손누트 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고 있던 비행기 기내에서 이씨와 배씨를 체포했다.

중정 조사 과정에서 이씨는 중립국으로 가서 북한 체제와 남한 체제를 동시에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고, 이를 통해 북한의 가족들을 데려올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실행됐더라면 김형욱은 자리를 내놓았어야 했을 것이다. 김형욱은 이씨를 이중간첩으로 둔갑시켜 이 위기를 돌파한 것이다.

이수근씨는 특히 당시 감찰실장 방모씨로부터 인격모독적인 대우를 여러 차례 받았다. 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이수근씨는 이대용 전 주월 공사에게 “(방모 감찰실장이)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했다”고 말했다.

29세였던 배경옥씨 72살 노인으로
배경옥씨는 탄손누트 공항에서 체포되어 남산에서 조사받을 때 생긴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몸이 불편하다. 배씨는 “조사는 각본대로 했다. 불러주면 받아쓰라는 것이었다”면서 “알몸 상태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아 빨리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중정요원들의 이름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요원들은 모두 ‘이 전무, 김 사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배씨는 “딱 한 사람, 조필웅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밝힌 사람은 알고 있다.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인데 정말 악질이었다”고 말했다.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청춘과 가족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68년 여동생 결혼식 때문에 귀국했다가 생면부지의 이모부를 처음 만난 후 인생이 바뀌었다. 20년 복역 후 출소한 지 반 년만에 사귀던 여자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큰아들이 자살했다. 배씨는 “아들이 내가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괴로웠던 것 같다”면서 “죽어서라도 아들 앞에 내가 간첩이 아니란 걸 말할 수 있다면…”이라고 울먹이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배씨는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89년 출소 직후에만 이런 판결이 나왔더라도 뭔가 할 수 있었겠지만 내년이면 내 나이 일흔둘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배씨의 변호를 맡았던 최종선 변호사는 “김형욱은 초기에는 이수근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이수근이 탈출하고 이틀이 지나서야 상황을 파악하자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간첩으로 몰아버렸다”고 말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권력기관의 수장이 함부로 내두른 용공조작의 칼날이 한 개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2009 01/06   위클리경향 807호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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